[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주님께서 위로하시도록 스스로를 내어 맡기자”


“주님께서 위로하시도록 스스로를 내어 맡겨야 하며, 불평과 원한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2월 11일 오전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봉헌한 미사 강론을 통해 이같이 강조했다. 교황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위로를 약속하신 내용을 다룬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구절(이사 35,1-10)을 성찰하며,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러 오셨다”고 강조했다. 이어 교황은 이냐시오 성인 또한 몇몇 친구들이 다른 친구들을 위로했던 방식과 비교하면서, “위로자이신 그리스도의 직무를 관상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아울러 교황은 루카 복음의 부활의 아침을 떠올리면,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나타났을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교황은 “많은 경우에 주님의 위로는 경이로움으로 여겨진다”고 단언했다.

“주님께 위로 받기 위해 자신을 내어 맡기라고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우리는 부정적인 것에 집착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상처에 집착하기 때문에, 홀로 그곳에 남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루카 5,17-26)에 나오는 평상에 누워있는 병자처럼, 고립된 채 거기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어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항상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부정적인 것에 숙달되어 있는 것”이라고 교황은 설명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죄의 상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긍정적인 것에는 구걸하는 입장이지만” 위로를 구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사례를 들었다. (만일 남에게) “원한” 갖기를 좋아한다면, 우리는 울분의 국을 끓이며 “우리의 감정을 요리하게 되는 것”이며, “쓰라린 마음”이 있다면,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괴로움이 된다. 이어 교황은 벳자타 못의 중풍병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 중풍병자는 38년 동안 벳자타 못 옆에 괴롭게 누워있었지만, 물이 출렁거릴 때마다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한다(요한 5,1-18). 교황은 “이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말보다는 고통에 동감하는 쓰라린 말이 더 아름답다”며,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고통을 선택한다는 점을 주목했다. “아픈 뿌리는 원죄에 대한 기억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 받기 위해 자신을 내어 맡기지 못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항상 우리의 불평을 표현하게 만드는” 괴로움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서 그분을 찬양하는 대신 불평을 토로한다. 곧, 인생과 동반되는 음악처럼 불평을 노래한다. 교황은 성녀 데레사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를 부당하게 대했고, 제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을 했어요’라고 말하는 수녀는 불행합니다.” 더 나아가 교황은 요나 예언자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그를 “불평의 노벨수상자 후보”라고 정의했다.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행하실 일을 불평했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쳤고, 결국 물에 빠졌으며, 물고기에게 삼켜진 다음에서야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러 돌아갔다. 사람들의 회개를 기뻐하는 대신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불평을 터뜨렸다. 아울러 교황은 “불평에도 모순이 존재한다”면서, 아주 훌륭한 사제였지만 모든 것을 불평했던 사제의 사례를 들어 말했다. “그 사제는 우유에 파리가 빠졌을지 몰라 굳이 휘저으며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사제였고, 고해성사를 베풀 때에는 자비심이 아주 넘친다는 평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연로한 사제였기에, 동료 신부님들은 그가 어떻게 죽을지, 또 하늘에 갔을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성 베드로에게 인사하는 대신, 항상 부정적인 사람이니까 제일 먼저 이렇게 말할 거야. 지옥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 성 베드로는 그에게 지옥을 보여주겠지. 그가 지옥을 본 다음에는 이렇게 말하겠지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게 됩니까? 그러면 이런 대답을 듣겠지. 단 한 사람이라네. 그러면 그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겠지. 아, 구원이 난감하군요.’ (...) 늘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괴로움, 원한, 불평 앞에서,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하는 말은 ‘용기’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사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시기” 때문에 용기를 내라고 초대하고 있고, 그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어 교황은 오늘 복음(루카 5,17-26)을 언급하면서, 군중이 많았기 때문에 몇 사람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중풍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낸 장면을 상기시켰다. 그들은 그 자리에 율법학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그 사람이 낫기만을 원했다.  

교황은 “오늘 전례 말씀의 메시지는 실로 주님으로부터 위로 받도록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한다는 것”이라며 강론을 끝맺었다.

“주님께 위로 받기 위해 자신을 맡기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기주의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괴로움이든, 불평이든, 많은 사연이든, 자신의 보물이 되는 것들을 벗어버려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 각자, 오늘 양심성찰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곧, 내 마음은 어떠한가? 내 마음에는 어떤 괴로움이 있는가? 어떤 슬픔이 있는가? 내 말투는 어떤가? 아름다운 말로 하느님을 찬양하는가, 아니면 항상 불평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러 오시도록 용기의 은총을 청하고, ‘주님, 저희를 위로하러 오십시오’라고 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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